아무래도 괜찮다고 이제는 아무래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까짓 이별쯤, 그까짓 사랑쯤, 그까짓 인연쯤 천천히 옅어지는 너를 보다가 한 번 더 고개를 젓는다. 너는 오늘 또 조금 더 잊혀졌다. 그러다가 그러다가도 서늘한 바람과 함께 나를 휘감던 너의 체취가 기억나면 모든 것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너의 손을 잡았던 그때의 나를 부른다. 나의 슬픔 2023.10.07
나만 몰랐던 이야기 저런, 아무도 너에게 말해주지 않았나 보구나. 너는 악마란다. 어서 지옥으로 오렴. 거긴 네가 있을 곳이 아니야. 나의 경계 - 비현실의 어디쯤 2023.04.19
혼자 혼자 있어야 해 외로워야 해 자꾸만 다른 누군가를 상처 입히고 분노케 하고 실망시키지 마 외롭다는 핑계로 혼자 있기 싫다는 이유로 일어나지 마 나오지 마 그냥 지금 그대로 어둠 속에 앉아서 팔에 얼굴을 묻고 조용히 그대로 조용히 있으렴 어둠이 너의 안식이고 고요가 너의 위안이야 외로움은, 너야 나의 경계 - 비현실의 어디쯤 2023.04.16
부서진다 몸이 부서질 것 같다 몸이 부서질 것 같은 것은 몸의 문제 일까 마음의 문제일까 부서질 것 같은 마음이 몸으로 드러나는 걸까 몸이 부서질 것 같아 마음도 함께 부서지는 걸까 오한과 헛구역을 참다가 몸살약을 먹어본다 따뜻한 물이 담긴 컵에 두 손을 모으고 온기가 심장까지 전해져 오길 바라본다 약기운이 몸에 돌면 나아질까 이 부서질 것 같은 몸과 마음은 산산조각 나야, 완전히 부서져야 끝이 날까 나의 슬픔 2023.04.16
낯선 삶을 살며 내 삶이 내 것이 아닌 것 같을 때 나는 숨을 쉬는 일마저 버겁다 달려오는 차를 아랑곳하지 않고 길을 건너다 화난 운전자가 창문을 내리고 욕을 해도 멍하게 쳐다보기만 할 뿐이다. 나는 이 낯선 삶에서 길을 잃었다. 애초에 길은 없던 것일지도 모른다. 이제 내게 남아 있는 것이 많지 않고 그것들을 애써 끌어모아도 결국 못난 나 자신일 뿐이다. 익숙한 삶이 무엇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 나의 앞에 능숙하게 솟은 커다란 나무 한 그루 나는 어깨를 잠시 기대어 그 편에 쉰다. 나의 위안 2023.04.14
작아진다 비가 오는 날엔 한 사람이 커진다. 우산의 가장자리가, 새로운 경계를 만든다. 그것은 어쩌면 마음의 끄트머리 비는 그 옆으로 흘러내린다. 어떤 두 사람은 더 작아진다. 그들은 어깨를 감싸 안고 더 가깝게 걷는다. 때로는 우산 밖으로 몸이 젖어도 추운 줄을 모른다. 점점 그들의 공간은 작아지고, 작아진다. 나는 창 밖으로 그 모습을 본다. 나의 슬픔 2023.04.13
뜯는 곳 다 마신 페트병을 가만히 보다가 뜯는 곳이라고 쓰여 있는 부분을 봤다. 뜯는 곳이라고 되어있지만 뜯기 어렵게 되어있다. 단단한 비닐 재질이다. 잘못 손대면 오히려 손톱이 들린다. 조심해야 한다. 부드득하고, 힘을 주어 잘 떼어내면 페트병을 감싸고 있던 껍데기가 떨어져 나간다. 그러고 나면 원래 어떤 모습이었는지 알 길이 없어진다. 투명한 페트병만 남는다. 아이덴티티가 없어진다. 어쩌면 뜯는 곳이라고 써 있지만 뜯기 어렵게 되어있는 이유는 아이덴티티가 없어지기 싫어서 아닐까. 똑같이 생긴 투명한 페트병들끼리 모여져 부서지고 갈아져 다시 태어나기 싫어서 인 것 아닐까. 어쩌면 페트병은 자기 자신인 채로 버려지길 바라는 것일지도 모른다. 카테고리 없음 2023.03.19
낙엽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수분이 다 빠져나가고 바닥으로 떨어져 바스러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낙엽에 아무리 물을 준들, 아무리 햇볕을 쬔들 달라지는 것은 없다. 죽은 낙엽에 초록빛이 돌아오며 잎맥이 다시 살아나는 일은 현실세계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적당한 바람을 기다린다. 아니면 적당한 진동이라도. 지금 매달린 이 줄기에서 벗어나 바닥에 떨어지길. 그리고 무심코 내딛은 어느 걸음에 산산이 바스러지길 기다린다. 까맣게 말라버린 낙엽은 한 방울의 피도 흘리지 않는다. 그저 먼지처럼 흩어질 뿐이다. 그래서 아무도 슬퍼할 필요 없어. 괜찮아. 그렇게 흩어지면 또 우주를 돌고 돌아 어느 생명으로 태어나겠지. 안녕, 안녕. 나의 슬픔 2023.03.13
죽은 듯이 살았어야 하는데 죽은 듯이 살았어야 하는데 건방지게 사는 것 같이 살다가 결국. 거친 손길에 물속에 고개가 처박혀 아등바등 숨을 못 쉬어도. 한 마디 변명하는 것도 가까스로 숨을 내뱉는 것도 귀를 막는 것도 눈을 감는 것도 사치라서 나는 그냥 내 옷을 찢는다. 그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내 옷을 찢었다. 다 찢고 나면 그 뒤엔 무얼 찢을까. 나의 슬픔 2023.03.01
글을 토해 나는 오늘도 쉴 새 없이 글을 토해. 그게 숨 쉬는 것인 양 그렇게 해. 그렇지 않으면 숨을 쉬고 싶지 않을까 봐 그래. 아무 생각도 하지 않을 때 모든 생각이 떠올라서 힘들어. 그래서 뭐든 해. 대개는 누가 시키지 않은 일까지 맡아서 해. 그래야만 살 수 있으니까 이해해 줘. 정신없이 바빠야해. 숨 돌릴 틈도 없어야 해. 일을 해야 해. 글을 써야 해. 생각아 멈추면 안 돼. 빨리, 더 빨리 떠올려. 뭐든 떠올려, 뭐든 써야 해. 글을 토해. 신물이 나오고 내장이 다 튀어나올 정도로, 멈추지 마. 멈추면 안 돼. 멈추면 그때가 바로. 나의 위안 2023.0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