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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박

숨이 멎은 뒤 관에 들어갈 때처럼, 왼손을 오른쪽 어깨 위에 올리고 오른 속으로 왼쪽 어깨를 잡는다. 나는 순순히 결박되어 침대에 눕는다. 결박되지 않으면 내가 내 목을 조를 거라고 의사가 말한다. 뭐, 죽는 것 보단 낫죠.라고 아무렇지도 않은 말투로 의사가 말한다. 결박되어 있지 않은 눈에서 하염없이 눈물이 흐른다. 재갈은 물리지 않는다. 혀는 깨물지 않는다. 어두운 병실에서 소스라치게 놀라며 잠에서 깬다. 어떻게든 결박을 풀어보려 발버둥 치다가 침대 아래로 떨어진다. 떨어져 얼굴을 찧는다. 코뼈가 깨진 듯 저리고 아파온다. 이내 뜨거운 피가 바닥에 번진다. 몸을 돌려 바닥에 누워 회색 천장을 바라본다. 흐르는 피가 숨을 막는다. 콜록, 하는 기침 소리에 빨간 핏물 방울이 튄다. 몇 방울은 후둑, 하고..

나의 슬픔 2023.02.20

울면서 - 23년 2월 18일(토)

울면서 깨는 일이 잦아졌다. 울었던 이유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 게 대부분이다. 안개처럼 희미하다. 기억이 날듯, 그러다 말듯. 나는 먹먹하게 울다가, 가슴을 치다가, 소리를 지르다가 잠에서 깬다. 잠에서 깨어나 눈을 비비면 말라버린 눈물을 발견한다. 나는 그토록 많이 울었던 유년 시절, 그리고 그토록 울지 않았던 청소년기를 지나 이제는 꿈에서 운다. 몰래 흘려야 하는 눈물이어서 조금 더 슬프다. 위로 받을 수도, 위로 해줄 사람도 없어서 눈물은 금새 마른다. 아니 어쩌면 흘리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럼 흐르는 것은 무엇일까. 그저 나의 生이 흐르는 것일 수도 있겠다.

기어코

너는 기어코 나를 끊어낸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늘 그랬다. 늘 그래왔다. '네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어.' 너는 자주 말했고 나는 자주 무력했다. 너는 황홀과 불안 모두를 내게 주었다. 황홀과 불안은 아주 구체적으로 나에게 상흔을 남겼다. 지워지지 않는다. 선택된 황홀과 불안, 이 두 가지 내게 있으니 - 폴 베를렌 이 문구로 시작하는 다자이 오사무의 '만년'의 첫 문장은 '나는 죽을 생각이었다.'이다. 나는 어쩔 생각인 걸까. 다자이 오사무는 투신하여 목숨을 끊었다. 기어코, 기어코.

나의 슬픔 2023.02.18

기침

역시나 그렇지. 그것은 갑자기 온다. 영하 30도인 걸 잊고 헛바람을 들이켤 때 폐를 찌르는 찬 기운의 고통처럼. 바늘로 찌르는 것처럼 갑자기 그렇게 온다. 그러고 나면 끝없는 기침이 난다. 기침이 나다 피를 토한다. 그래도 기침은 멈추지 않는다. 무릎이 꺾인다. 땅에 손을 짚고 바닥에 엎드린다. 기침은 멎지 않는다. 하얀 눈이 빨갛게 물든다. 빨게 물든 눈은 다시 얼어버린다. 눈을 짚은 손이 얼어간다. 손에 느껴지는 감각은 무뎌져가는데 멎지 않는 기침 때문에 날카로운 고통은 목과 폐를 잠식하고 점점 심장에 가까워온다. 콜록콜록 나는 내장을 다 토해낼 듯 계속 기침을 한다. 피를 토해도 멈추지 않는다. 차라리 죽고 싶다.

나의 슬픔 2023.02.09

꽃 줄기를 자르며

때때로 꽃을 산다. 그러나 금세 시들곤 했다. 어느 날엔가 프리지아 한 다발을 샀다. 반쯤 피어있고 반쯤은 피지 않은 봉우리였다. 플로리스트가 말했다. "줄기를 매일 잘라주시면 모든 꽃이 다 피는 걸 보실 수 있어요." 나는 의아했다. 줄기를 자르면 안좋은 거 아닐까. 꽃이 아프진 않을까. 나는 플로리스트의 말대로 매일 줄기를 잘라 줬다. 절삭력이 좋은 가위로, 사선으로 깊이, 물속에서 잘라줘야 한다고 해서 그 말을 따랐다. 생살을 자르는 것처럼 아플텐데 라는 생각을 하면서 눈을 질끈 감고 잘랐다. 후두둑 하고 잘린 줄기들이 떨어졌다. 남은 줄기는 깨끗한 수관이 열려 물을 더 잘 흡수했다. 프리지아는 모든 꽃을 피웠다. 아픔을 느낀 건 나 혼자만일 수도 있다. 프리지아는 더 오래 살아남았다. 나는 근거없..

나의 위안 2023.02.04

사놓고 읽지 않는 책

사놓고 읽지 않는 책이 쌓여 간다. 한 번 입고 개어 놓은 옷들이 자취를 감췄다. 언젠가는 먹겠지 하고 얼린 냉동고의 음식들은 원래의 정체를 잃었다. 한 번 볼까? 하는 의미 없는 인사는 발자취도 남기지 않는다. 요즈음, 나는 자주 잊는다. 약 때문인지 다른 무엇 때문인지 알 길은 없다. 과거의 나는 머릿속에 체크리스트 같은 것이 있었다. 해야 할 일을 하나씩 지워가며 작은 일 하나 빠뜨림 없이 챙겨 왔다. 다 기억 못 할 것 같으면 어디든 기록해 놨다.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는 일은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처럼 여겼다. 나는 요즈음, 자주 잊는다. 집 안에서도 두세 걸음 걷다가 내가 어디로 무엇을 가지러 가는지 잊는다. 그럴 땐 가만히 서서 마른세수를 하거나 머리카락을 손으로 빗어 넘긴다. 그러면..

나의 슬픔 2023.01.29

짙은 녹색 - 23년 1월 28일(토)

나는 목을 매달기 위해 단단한 파이프가 천정에 고정된 장소에 서 있었다. 내 옆에는 엄마가 있었다. 내 손에는 하얀 천이 들려 있었다. 이것으로 목을 매는구나, 나는 천을 내려다보았다. 그러자 엄마가 말했다. "이건 어떠니." 엄마는 짙은 녹색의 천을 내 손에 쥐어주곤, 하얀 천을 가져갔다. "네 아버지가 목을 맬 때 썼던 천이란다." 아버지가 나보다 어릴 무렵 오랜 시간을 보냈던 군복의 그것과 닮은 녹색이다. 나는 끄덕이고는 "이게 좋겠네요."라고 대답했다. 조심스럽게 천을 반으로 접고 접힌 중앙 부분을 턱 밑에서부터 묶어 올렸다. 천은 부드러웠다. 부드럽구나. 죽음도 이렇게 부드러우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올라선 의자는 왼쪽으로 한번, 오른쪽으로 한번 흔들했다가 넘어뜨렸다. 언젠가 봤던 영화의 기억을 ..

눈이 멈추는 시간

선생님, 이런 기분은 처음이에요.힘이 들어요. 어떤 기분인데요? 이전에는 우울하거나 불안했는데... 지금은 서글퍼요. 슬퍼요. 눈물이 날 것 같아요. 선생님은 새로운 약 처방 때문이라고 말했다. 나는 손과 팔에 발작 처럼 일어나는 경련 증상도 새로 생겼다고 덧붙였다.선생님은 그것 역시 새로운 약 처방 때문일 것이라고 추측했다. 비상약 다 먹었나요? 라는 질문에 나는 다 떨어진지 오래 되었다고 대답했다. 선생님은 비상약을 처방해주며, 한 알을 먹고도 힘이 들면 한 알을 더 드세요. 라고 조언했다. 눈이 오고 있었다. 눈은 아래로 내렸다가 위로 올라갔다. 바람을 따라 움직였다. 그러다가 바람이 멈추자, 눈이 따라서 멈췄다. 눈이 멈추자 시간이 멈춘 듯 했다. 나는 시간이 멈춘 그 자리에 우두커니 잠시 서 있..

나의 슬픔 2023.0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