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슬픔

사놓고 읽지 않는 책

장초연 2023. 1. 29. 2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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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놓고 읽지 않는 책이 쌓여 간다. 한 번 입고 개어 놓은 옷들이 자취를 감췄다. 언젠가는 먹겠지 하고 얼린 냉동고의 음식들은 원래의 정체를 잃었다. 한 번 볼까? 하는 의미 없는 인사는 발자취도 남기지 않는다. 요즈음, 나는 자주 잊는다. 약 때문인지 다른 무엇 때문인지 알 길은 없다. 과거의 나는 머릿속에 체크리스트 같은 것이 있었다. 해야 할 일을 하나씩 지워가며 작은 일 하나 빠뜨림 없이 챙겨 왔다. 다 기억 못 할 것 같으면 어디든 기록해 놨다.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는 일은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처럼 여겼다.

 

나는 요즈음, 자주 잊는다. 집 안에서도 두세 걸음 걷다가 내가 어디로 무엇을 가지러 가는지 잊는다. 그럴 땐 가만히 서서 마른세수를 하거나 머리카락을 손으로 빗어 넘긴다. 그러면 다행히, 대개의 경우는 원래의 생각이 떠오른다. 가끔은 안타깝게도 영영 잃어버리고 만다. 잊어버리는 게 아니라 잃어버리는 것이다. 기억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영영 찾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사놓고 읽지 않은 책이 촘촘하게 꼽혀있는 책장에서 오른쪽 검지 손가락으로 한 권을 꺼낸다. 이 책은, 그래 이 책은 앞 쪽을 서른 페이지 정도 읽은 책이다. 펼쳐보니 이곳저곳에 파스텔 톤 형광펜으로 밑줄이 그어져 있다. 분명 내가 그었을 텐데도 생경한 기분을 떨칠 수 없다.

 

그러다 가만히 생각해 본다. 모든 것을 잃게 된다면, 잊게 된다면 조금은 더 나아질까? 얼마 전에는 천국인 줄 알았던 곳이 사실 지옥이었다는 드라마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악몽을 꾸지만 현실만큼 고통스러운 악몽은 없다.

 

사놓고 읽지 않는 책, 살아가면서 살지 않는 삶. 그게 지금의 내 모습이다. 잃고 잊어가며 하루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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