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슬픔 17

부서진다

몸이 부서질 것 같다 몸이 부서질 것 같은 것은 몸의 문제 일까 마음의 문제일까 부서질 것 같은 마음이 몸으로 드러나는 걸까 몸이 부서질 것 같아 마음도 함께 부서지는 걸까 오한과 헛구역을 참다가 몸살약을 먹어본다 따뜻한 물이 담긴 컵에 두 손을 모으고 온기가 심장까지 전해져 오길 바라본다 약기운이 몸에 돌면 나아질까 이 부서질 것 같은 몸과 마음은 산산조각 나야, 완전히 부서져야 끝이 날까

나의 슬픔 2023.04.16

낙엽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수분이 다 빠져나가고 바닥으로 떨어져 바스러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낙엽에 아무리 물을 준들, 아무리 햇볕을 쬔들 달라지는 것은 없다. 죽은 낙엽에 초록빛이 돌아오며 잎맥이 다시 살아나는 일은 현실세계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적당한 바람을 기다린다. 아니면 적당한 진동이라도. 지금 매달린 이 줄기에서 벗어나 바닥에 떨어지길. 그리고 무심코 내딛은 어느 걸음에 산산이 바스러지길 기다린다. 까맣게 말라버린 낙엽은 한 방울의 피도 흘리지 않는다. 그저 먼지처럼 흩어질 뿐이다. 그래서 아무도 슬퍼할 필요 없어. 괜찮아. 그렇게 흩어지면 또 우주를 돌고 돌아 어느 생명으로 태어나겠지. 안녕, 안녕.

나의 슬픔 2023.03.13

죽은 듯이 살았어야 하는데

죽은 듯이 살았어야 하는데 건방지게 사는 것 같이 살다가 결국. 거친 손길에 물속에 고개가 처박혀 아등바등 숨을 못 쉬어도. 한 마디 변명하는 것도 가까스로 숨을 내뱉는 것도 귀를 막는 것도 눈을 감는 것도 사치라서 나는 그냥 내 옷을 찢는다. 그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내 옷을 찢었다. 다 찢고 나면 그 뒤엔 무얼 찢을까.

나의 슬픔 2023.03.01

결박

숨이 멎은 뒤 관에 들어갈 때처럼, 왼손을 오른쪽 어깨 위에 올리고 오른 속으로 왼쪽 어깨를 잡는다. 나는 순순히 결박되어 침대에 눕는다. 결박되지 않으면 내가 내 목을 조를 거라고 의사가 말한다. 뭐, 죽는 것 보단 낫죠.라고 아무렇지도 않은 말투로 의사가 말한다. 결박되어 있지 않은 눈에서 하염없이 눈물이 흐른다. 재갈은 물리지 않는다. 혀는 깨물지 않는다. 어두운 병실에서 소스라치게 놀라며 잠에서 깬다. 어떻게든 결박을 풀어보려 발버둥 치다가 침대 아래로 떨어진다. 떨어져 얼굴을 찧는다. 코뼈가 깨진 듯 저리고 아파온다. 이내 뜨거운 피가 바닥에 번진다. 몸을 돌려 바닥에 누워 회색 천장을 바라본다. 흐르는 피가 숨을 막는다. 콜록, 하는 기침 소리에 빨간 핏물 방울이 튄다. 몇 방울은 후둑, 하고..

나의 슬픔 2023.02.20

기어코

너는 기어코 나를 끊어낸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늘 그랬다. 늘 그래왔다. '네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어.' 너는 자주 말했고 나는 자주 무력했다. 너는 황홀과 불안 모두를 내게 주었다. 황홀과 불안은 아주 구체적으로 나에게 상흔을 남겼다. 지워지지 않는다. 선택된 황홀과 불안, 이 두 가지 내게 있으니 - 폴 베를렌 이 문구로 시작하는 다자이 오사무의 '만년'의 첫 문장은 '나는 죽을 생각이었다.'이다. 나는 어쩔 생각인 걸까. 다자이 오사무는 투신하여 목숨을 끊었다. 기어코, 기어코.

나의 슬픔 2023.02.18

기침

역시나 그렇지. 그것은 갑자기 온다. 영하 30도인 걸 잊고 헛바람을 들이켤 때 폐를 찌르는 찬 기운의 고통처럼. 바늘로 찌르는 것처럼 갑자기 그렇게 온다. 그러고 나면 끝없는 기침이 난다. 기침이 나다 피를 토한다. 그래도 기침은 멈추지 않는다. 무릎이 꺾인다. 땅에 손을 짚고 바닥에 엎드린다. 기침은 멎지 않는다. 하얀 눈이 빨갛게 물든다. 빨게 물든 눈은 다시 얼어버린다. 눈을 짚은 손이 얼어간다. 손에 느껴지는 감각은 무뎌져가는데 멎지 않는 기침 때문에 날카로운 고통은 목과 폐를 잠식하고 점점 심장에 가까워온다. 콜록콜록 나는 내장을 다 토해낼 듯 계속 기침을 한다. 피를 토해도 멈추지 않는다. 차라리 죽고 싶다.

나의 슬픔 2023.02.09

사놓고 읽지 않는 책

사놓고 읽지 않는 책이 쌓여 간다. 한 번 입고 개어 놓은 옷들이 자취를 감췄다. 언젠가는 먹겠지 하고 얼린 냉동고의 음식들은 원래의 정체를 잃었다. 한 번 볼까? 하는 의미 없는 인사는 발자취도 남기지 않는다. 요즈음, 나는 자주 잊는다. 약 때문인지 다른 무엇 때문인지 알 길은 없다. 과거의 나는 머릿속에 체크리스트 같은 것이 있었다. 해야 할 일을 하나씩 지워가며 작은 일 하나 빠뜨림 없이 챙겨 왔다. 다 기억 못 할 것 같으면 어디든 기록해 놨다.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는 일은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처럼 여겼다. 나는 요즈음, 자주 잊는다. 집 안에서도 두세 걸음 걷다가 내가 어디로 무엇을 가지러 가는지 잊는다. 그럴 땐 가만히 서서 마른세수를 하거나 머리카락을 손으로 빗어 넘긴다. 그러면..

나의 슬픔 2023.01.29

눈이 멈추는 시간

선생님, 이런 기분은 처음이에요.힘이 들어요. 어떤 기분인데요? 이전에는 우울하거나 불안했는데... 지금은 서글퍼요. 슬퍼요. 눈물이 날 것 같아요. 선생님은 새로운 약 처방 때문이라고 말했다. 나는 손과 팔에 발작 처럼 일어나는 경련 증상도 새로 생겼다고 덧붙였다.선생님은 그것 역시 새로운 약 처방 때문일 것이라고 추측했다. 비상약 다 먹었나요? 라는 질문에 나는 다 떨어진지 오래 되었다고 대답했다. 선생님은 비상약을 처방해주며, 한 알을 먹고도 힘이 들면 한 알을 더 드세요. 라고 조언했다. 눈이 오고 있었다. 눈은 아래로 내렸다가 위로 올라갔다. 바람을 따라 움직였다. 그러다가 바람이 멈추자, 눈이 따라서 멈췄다. 눈이 멈추자 시간이 멈춘 듯 했다. 나는 시간이 멈춘 그 자리에 우두커니 잠시 서 있..

나의 슬픔 2023.01.27